혜진은 오늘도 눈 밑에 다크서클을 달고 출근했다.
“아… 제발 이번에 승호랑은 싸우지 말자. 싸우지 말자…”
엘리베이터 안 거울을 보며 중얼거렸다.
근데, 딱.
열리자마자, 디자이너 승호가 커피 두 잔을 들고 있었다.
“어, 마케터님. 이거… 어제 싸운 거 사과하려고. 아아 하나 드세요.”
혜진은 잠시 멈췄다.
‘이 자식, 이렇게 웃으니까 좀… 귀엽네?’
“어… 뭐야. 갑자기 왜 이렇게 착해?”
“아니, 뭐… 어제는 내가 좀… 감정적이었죠.”
승호는 허둥지둥 머리를 긁적였다.
회의실.
“그러니까, 이번 이벤트 비주얼은 조금 더 라이트하고 페미닌한 무드를—”
“혜진 씨, 그만. 어제 말씀하신 페미닌, 라이트, 소프트… 그만 좀 해요. 그냥 예쁘게 하면 되잖아요.”
승호가 갑자기 펜을 집어 들고 종이에 막 선을 긋기 시작했다.
혜진은 그걸 보다가 피식 웃음이 터졌다.
“야, 너 멘탈나가갔니?”
“멘탈은 이미 너한테 뺏겼는데요?”
순간, 공기가 멈췄다.
승호는 입을 막았다. 혜진도 얼었다.
“…뭐라고?”
“아… 아니, 그… 제 멘탈이… 그… 디자인적으로…”
“아니, 방금… 멘탈을 나한테 뺏겼다고 했잖아.”
회의실 유리벽 너머로 지나가는 인턴이 흘끗 쳐다봤다.
둘은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점심시간.
분위기는 여전히 어색했다.
승호가 조심스레 혜진의 김밥 한 조각을 집어 들었다.
“야! 그거 내 거야!”
“아, 하나만… 어제 너무 혼나서 에너지가 부족해서 그래…”
“뭔 개소리야. 너 혼내기 전에 이미 네가 내 멘탈을 찢었거든?”
“내가? 언제?”
“네가 지난번 배너 디자인에 핑크 네온 썼을 때! 내가 얼마나 욕 먹었는데!”
“그건… 핑크가 아니고… 매지컬 퓨시아…”
“아오, 또 시작이네.”
하지만 혜진은 웃었다.
그리고 승호도 웃었다.
그러자 주변 사람들도 하나둘 힐끗 보다가 피식 웃었다.
저녁.
둘은 야근 중, 편의점 맥주를 사 들고 회사 옥상에 올라갔다.
“근데, 솔직히… 너랑 이렇게 싸우고 일하는 거, 나쁘지 않다.”
“왜?”
“왠지… 살면서 이렇게 솔직하게 감정 드러낸 적 잘 없어서.”
승호는 조용히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혜진 씨, 나 솔직히… 너 되게 멋있다고 생각했어. KPI 타령하면서도, 밤새 폰 붙잡고 데이터 보던 거.”
“…야, 갑자기 왜 이래.”
“그냥… 내 멘탈 진짜 네가 가져갔나 봐.”
혜진은 뚜껑도 안 딴 맥주를 들고 한참을 들여다봤다.
그날 밤,혜진은 술김에 회사 단톡방에 메시지를 썼다.
‘디자이너랑 화해했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더는 싸움이 아닌 다른 걸로 부딪힐 것 같습니다.’
문장을 보내고 폰을 내려놓았다.
옥상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살짝 달달했다.
마치, 탄산 맥주 거품 같은 로맨틱한 기분.
내일도 둘은 또 싸울 거다.
배너가 너무 화려하네, 카피가 촌스럽네, 고객 여정이 어쩌네…
하지만 이제 그 싸움 속에는, 서로를 향한 작고 은근한 설렘이 숨어 있었다.
어쩌면 마케팅 성과보다 더 중요한 KPI, 그건… 바로 심장 박동 수치였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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