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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의 개업식..

2007.11.21 15:07

아들러

조회수 8,156

댓글 32

1.

11월 19일.

2호선 사당역에서 방배동 방향으로 번화한 유흥가를 지나,
이수초등학교 담벼락을 왼쪽으로 두고 걷다 보면 오른 편 인적도 드문 골목길 안에
있는 빨간색 간판의 식당.

권리금도 없이 보증금 천만원.
테이블 5개 놓으면 꽉 차는 좁은 실내.

절친한 고등학교 동창 중에서도 나와 유일하게 중학교도 같이 다녔던
내 친구의 식당 개업식이 있던 날.



2.

점심메뉴 - 5천원짜리 웰빙영양부추비빔밤+된장찌개.
저녁메뉴 - 오리지널 한우 생등심 상등급 A1+급 1인분 150g 18,000원
호주산 우삼겹 1인분 180g 7,000원.

날고 긴다는 유명식당에서조차 잘 쓰지 않는 최상등급 한우라니.
대형할인마트에 가면 정육코너에서 100g 당 7~8,000원에 판매가가
적혀있어 저런 걸 사먹는 사람도 과연 있을까..생각했던 바로 그 한우.

그것도 떡볶이나 칼국수 팔면 딱 어울릴 것 같은 그 조그만 식당에서
한우 최상등급을 팔겠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땐 적잖이 놀랄 수 밖에.
일단 한우라고 그래도 그 조그만 식당에서 정직하게 한우를 판다 그러면
누가 믿어주기나 할까 하는 염려와, 마진이 너무 박해서 다행히
많이 팔린다 해도 인건비나 제대로 나오겠느냐는 걱정까지.

녀석은 25년지기 친구인 내가 이런저런 걱정으로 속이 타들어가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오래 전부터 주방장을 했던 것 마냥 제법 어울려 보이는
눈부시게 흰 주방장 유니폼을 입고 멋적은 웃음으로 나를 맞이했다.



3.

여느 개업집들처럼 나레이터 모델들을 세워두고 행인들의 시선을 끌게 할
형편은 애초부터 안되었다지만,
커다란 허수아비 같은 풍선을 세워놓고 아래쪽에서 인위적으로 바람의
세기를 조절해 연신 허리를 숙였다 세웠다 하며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게
만드는 장치 조차 없이.

또는 그도 아니면 풍선을 사다 입으로라도 불어서 문 앞에 동그랗게 아치형으로
장식해 놓아 신장개업했다는 표시라도 해주면 좋으련만,
개업 축하 기념으로 들어온 유리 문 앞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작은 화분 하나만이
녀석의 조촐하고 조용한 개업식을 대변해 주는 듯 했다.



4.

개업 첫날, 사람이 오면 얼마나 올까 싶어 9인분만 준비해 두었다는
점심메뉴 - 웰빙영양부추비빔밤+된장찌개.

대망의 첫 손님이 한꺼번에 4명이나 들어서자 뭐부터 해야될지 우왕좌왕
하는데다 너무 떨리기까지 해서, 곧 이어 2명의 손님이 더 들어오자
하도 정신이 없어 속으로 "이제 그만 좀 들어왔으면.." 하는 엉뚱한
생각까지 했다던 웃긴 녀석.

점심에 열여덟 그릇을 팔고 9만원을 벌어, 그날 아침에 주문한 야채값 8만원을
치르고 나니 1만원이 남았더라며 웃을 땐 나도 따라 웃을 수 밖에 없었다.



5.
인터넷 사업을 해서 돈도 많이 벌어 여유롭게 골프도 치며
잘 사는 줄만 알았던 녀석.

새롭게 무역일을 해보려고 오피스텔도 얻고 새로운 일에 몰두하는가
싶었는데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시간만 질질 끄는 중에,
주식에 손을 댄 것이 화근이었다. 어느 새인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수중에 남은 돈이 탈탈 털고, 박박 긁어 천만원이었더라고 했다.

사무실 뒷편에 위치해 자주 가던 줄서서 먹는 허름한 고기집을 모델 삼아
아무 경험도 없이 뛰어든 식당업.
식칼이나 제대로 만져봤을까.
된장찌개를 직접 끓여본 적은 있나. 또 파무침은 무쳐봤냐고.

손님으로 식당을 이용하는 경험과 직접 운영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이거늘,
다짜고짜 식당한다고 덜컥 계약부터 하고 나서
"그래도 이 돈으로 이거라도 얻은 게 어디냐"며 천연덕스럽게
웃던 녀석이었다.



6.

공교롭게도 그 날은 녀석의 12주년 결혼기념일이기도 했다.
주방일이 손에 익지 않은 남편이 못 미더워 초등학교 1학년, 5학년인 아이들을
고모에게 맡겨두고 식당에 나와 하루종일 함께 일했던 제수씨.

여느 때 같았으면 호텔 부페나 맛있는 음식점에서 단란하게 12주년 결혼기념일을
보냈어야 할 날에,
제수씨는 제대로 식사도 못한 채 좁은 주방에 서서 온종일 설거지를 하고, 음식들을
준비하느라 빨갛게 부르튼 손을 연신 문지르며 이렇게 말했다.


"정말 식당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닌 것 같아요"




7.

최상등급 생등심답게 마블링이 바알간 속살 사이사이 골고루 퍼진 등심을,
적당한 온도로 달궈낸 동그란 철판 위에 올려 놓고 육즙이 고기 위로 올라올 때
한 번 더 뒤집어 약간 익힌 다음 소금에 찍어먹어 보니..
비싼 고기라 생각해서 그런가, 아님 평소 싼 수입산 목심 부위만 먹던 싸구려
입맛이 놀래서였을까.
한우 쇠고기 특유의 풍부한 향과 고소한 맛이,
쫄깃거리는 씹는 재미까지 선사하며 목구멍을 막 타고 넘어갈 때 사레들린 듯
헛기침을 몇 번 하기까지 했으니.

거기에 꽃게와 대파 뿌리 등으로 육수를 내어 화학조미료를 쓰지 않고
천연양념으로만 맛을 낸 된장찌개는 내올 때 마다 항상 일정한 맛을 내지는
못했으나 특별히 맛이 좋았다.
그래, 주부 12년차의 음식 솜씨를 무시할 순 없을테지..




8.

자주 만나는 고등학교 동창들을 모두 불러내어, 개업식날 썰렁하지 않게 하는 데에는
성공하긴 했으나 녀석의 다른 지인 2명을 포함해 그 날 저녁 10시까지 찾아온
손님은 그게 전부였다.

월요일에, 매서운 추위에, 첫 눈과 함께 내린 진눈깨비까지.
악조건을 골고루 갖추었던 친구의 개업식은 그렇게 끝이 났다.




9.

나는 안다.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고단한 삶의 무게가 조금도 덜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어느 덧 진눈깨비가 거의 굵은 빗방울처럼 변해버려 녀석의 식당을 뒤로 한 채
우산을 쓰고 총총거리며 돌아서는 발걸음이 유난히 무거웠던 까닭은,
난데 없는 식당을 한다며 고생을 자초한 녀석에게 애틋한 연민이나 동정을
느껴서는 아니었으리라.


그것은 이제 곧 만 4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
가장으로서의 책무를 다해야 하고,
이 사회와 조직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구성원으로 남기 위해 애쓰는,
고달프고도 애처로운 우리네 슬픈 자화상이 새삼 떠올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0.

安사장.
개업 축하한다.



2007. 11. 21

昌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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